Imagine

Study/Social Science 2009/08/06 14:49

영국 런던에 있는 에비로드 스튜디오의 벽은 온갖 낙서들로 가득하다. Beatles가 자신들의 음악을 레코딩한 장소로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앨범 ‘Abbey Road’의 자켓 사진으로 유명한 곳이다지난 겨울 여행 중 이곳에 들른 나는 어느 한 팬이 적어 놓은 문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John, I’m still Imagine!’ 이라는 문구였다.

 

인간은 상상으로 비롯된 동물이다()은 관계를 의미한다인간의 상상력은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정의와 성찰로 이어진다.관계에 대한 성찰은 가족을마을을그리고 국가를 만들어낸다국가와 사회와 문화 모두 상상의 산물이다제도라 함은 이 상상을 현실에 붙여 넣는 접착제와 같다법률과 무력으로 공고하게 머무른 공동체적 상상력은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문화인류학에서 문화란 때때로 공유된 무관심을 의미한다고 한다이를 빗대자면역사 속에서 국가-제도로 발전한 인간의 관계맺음은 시대에 따른 공고한 공유된 상상력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회를 연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그것이 경험적이든혹은 이론적이든 둘 이상의 사람에서 출발하는 사회에 대한 연구는 관계와 성찰의 결합으로 이어진다그래서 그 관계를 어떻게 정의 내리고어디서 관계를 발견하느냐성찰을 어떤 시각으로 하느냐에 따라 사회과학의 연구와 결과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성찰의 결과가 만들어 낸 다양한 시각은 서로 대립한다이 대립은 무척 정치적이다가령 페미니즘은 주류 사회학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본다그러나 페미니즘의 프레임이 주류 사회학과 일정 부분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논의되고 통용되는 곳이 정치적이 때문이다정치적으로 승리한 시각은 저널리즘과 같은 통로를 거쳐 사회의 주류적인 의식을 만들어 낸다.반드시 학문의 범주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사회를 말하는 다양한 목소리에는 이와 같은 정치적인 헤게모니가 존재한다.

 

여기서 다시 그 공유된 의식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공유된 무관심’, 혹은 정치적으로 승리한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동시에 공유된 상상력’, ‘강요되고 있는 상상력이라 할 수도 있다사회는 곧 정치적으로 승리한 상상력이 지배하는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공고하게 굳은 상상력에는 향기가 없다상상은 본디 개별적인 것이다비록 제도는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상상의 제한 범위를 설정하고 있으나사회를 단순히 주류적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계에 대한 물음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성찰이 이어지기 위해선 상상이 필요하다사회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공유된 상상을 초월하는 상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 드 보봐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했을 때이 일갈의 대상은 단순히 페미니즘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여성뿐만 아니라 인간도관습도 모두 만들어지는 것이다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상상에서 비롯된다사회를 보는 데에는 정교한 방법론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비판적 상상력고민과 일탈을 거친 직관도 중요하다.

 

물론 모든 분석과 성찰의 결과는 단순한 윤리적 나열이 아닌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밀즈의 다소 시니컬한 비판에는 사실 제대로 상상할 것에 대한 요구가 함의 되어 있다그러나 단순히 학자에 국한된 상상력이 아닌 일상 속의 상상으로 그 논의를 넓혔을 때밀즈의 지적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유된 상상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으로 연결 지을 수 있다이는 곧 개개인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존 래넌이 Imagine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연대의식이다하지만 그의 노래 속 첫 소절은 늘 Imagine으로 시작한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magine no possesions’. 그가 꿈꾸는 연대는 사실 개개인의 의식적 자유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그 의식적 자유는 상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2009년 여름계절학기 정치사회학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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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코리 2009/08/07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짧고 분명하고 이야기가 있는 글은 늘 좋구나:) (I meant, 네 홈피에 로그인하기 위한 비번을 잊어버렸다는 것. 방명록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살대체용 중국산 담배와 빈부격차극복용 독일밀수담배가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등장한 한나 슈미츠는 문맹이다. 영화 속 이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자 반전이지만, 동시에 도덕적 판단에 대한 중요한 딜레마를 제공한다. 그녀의 문맹과 무지가 의지와 사유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유대인을 죽음으로 이끌었을 때, 과연 그녀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는 그녀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소설 속 한나 슈미츠가 재판정에서 말하는 모습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과 오버랩된다.

 

나치 시절의 충정스러운 관료,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과정을 다룬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분석이 녹아있다.. 아이히만이 재판 과정에서 보여주는 관용어에 지배당한 개인의 관습적이고 모순적인 모습, 개인의 정의(Justice)적 판단력이 상실된 악의 평범성에 관한 모습이다.

 

아이히만은 상투어와 관용어, 혹은 최종 해결책 수행을 위해 고안된 암호화된 언어를 통해 사유 체계를 제한시켰다. 이것은 판단 과정 속에서 현실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이히만은 일상 언어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현실 속 보편적 인류애를 느끼지 못했다. 관용어는 그에게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도록 했다. 이 언어로 둘러 쌓인 세계에서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 아이히만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의 부제로 악의 평범성(banality)’을 이야기 했다. 이것은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이 평범하다는 것이 아니다.사람들의 내면 속에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기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의 잘못이 악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와 같은 실체적 악이 아니다. 비판적 분석과 성찰을 상실한 평범성(banality)를 띠고 있었을 뿐이다. 비판적인 판단이 결여된 상태에서, 아이히만은 너무도 성실했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해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라고 덧붙인다.

 

전체주의, 파시즘은 하나의 공고한 사상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사유를 통제함과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된다. 통제는 하나의 신화로 귀결되는데, 일본의 천황이 그 유사한 예이다. 아이히만에게 주어진 언어적, 관료적, 직업적 환경은 전체주의의 현장에서 인간이 얼마나 주변 환경의 영향력을 받을 수 있는지 역설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나 아렌트가 더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이히만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평범성(banality)’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환경이 인간을 구성한다 하더라도, 그 환경보다도 판단을 내리는 인간에게 비판적 이성이 작동을 멈추는 순간, 무시무시한 반인류적 결과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역사 속에서 다시 등장하지 않고 있다. 사유와 비판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가 보편화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다양성이 중요시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평범성이 또다시 악으로 등장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이히만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인간이란, 보편적 믿음과 비판력을 상실한 순간, 타인과 인간으로서 관계 맺을 수 없게 된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주인공(꼬마라고 불린다)은 한나 슈미츠가 죽은 후 그녀의 감방에서 그녀가 직접 읽은 책을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그 한 켠에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보고서가 있었다. 소설 속 한나 슈미츠는 꼬마가 보내주는 녹음 테잎들과 함께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한나 슈미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글을 접하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책과 사유를 통해 비판적 판단을 시작한 순간, 한나 슈미츠는 어떤 말을 하고 싶어했을까. 한나 아렌트의 아이히만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이 가져야 할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돌이켜 보는 동시에, 1년 전 읽은 한나 슈미츠가 떠오른 것은 그 평범성에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게 조차 희망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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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Headache 창간호 기획기사.

서동욱이 돌아온다 해도 다시 1위를 할 수 있을까?

- 뻔한 사랑만 가득한 현장에서 90년대를 되돌아보다.

글. Astoria a.k.a. 김동인

12년 전, 1997년 초반 대중음악 차트 1~2위를 나눠 가지던 곡들이 있었다. 하나는 이승환의 5집 엘범 <Cycle>에 실린 ‘가족’과 ‘붉은 낙타’였고, 다른 하나는 전람회의 ‘졸업’ 이었다. 김동률과 서동욱이 뭉쳐 만든 전람회는 당시 발표한 3집 <졸업>을 마지막으로 해체했고, 서동욱은 직장인 생활을, 김동률은 지금까지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람회의, 그리고 서동욱의 마지막 음반인 <졸업>은 두 사람의 진로와 삶의 방향이 갈리는 순간을 의미했다. 이승환의 ‘붉은 낙타’가 20대를 뒤돌아 보는 읊조림이었던 반면, 전람회의 ‘졸업’은 20대의 절정에 등장한 노래였다. 많은 사람들이 두 청년의 헤어짐을 함께 동감하고, 이들이 노래하는 감성에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덧칠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후. 대중음악 차트에는 ‘졸업’의 감성이 사라졌다. 서동욱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디지털 싱글로 무장한 그녀와 그들의 사랑과 울부짖음이 들어섰다. ‘널 보고 싶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네가 죽을만큼 미워 죽겠다’고 반복해서 외친다. ‘왜 매일 커플링을 빼 놓느냐’며, 때때로는 ‘이 밤을, 토요일 밤을’ 화끈하게 보내자고 말한다.

대중음악에는 20대가 없다.

몇 년 째 차트를 잠식하는 많은 음악들은 쉽사리 '사랑'하거나 혹은 '이 밤을' 화끈하게 보내자는 메시지가 대다수다. 귀를 휘감는 멜로디와 비트도 익숙하다. 혹은 훅(Hook)이라 불리는 반복 어구가 TV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다. 시스템 속에서 메니지먼트 된 음악들은 대개 안전한 진로를 택한다. 그래서 전국민은 늘 이별했거나 사랑했거나 혹은 누군가를 찾는다. 개개인의 개인주의적 감성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덧칠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래가 없다. 20대가 없다.

대중음악에서 20대가 사라진 지는 꽤 오래 되었다. 포크와 대학가요제, 그리고 유재하 가요제 등을 통해 구성된 20대의 음악과 노래와 문화는 90년대가 지나가면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듣는 행위는 시스템과 메니지먼트로 무장해 곧 보고 소비하는 행위로 바뀌었다. 반복되는 멜로디와 동어 반복 문구를 흥얼거리면서 우리는 감동을 공유하는 대신 유행을 학습하고 읊는다.

대중음악 역사에 90년대는 의미가 크다. 80년대 포크의 시대가 지난 후, 한국 대중음악은 소위 다양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혼재의 시기였다. 무한궤도의 두 축이 넥스트와 015B로 나뉘었고, 윤상은 일렉트로닉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유재하 가요제에서 특유의 멜로디감과 감성을 보여 준 유희열은 프로젝트 그룹인 Toy를 만들었고, 그 사이 사이에 지금은 성인가요로 치부되는 김수희가 가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태지라는 거대한 흐름이 있었고, 90년대 말에는 초창기 아이돌(이제는 이들을 ‘초창기’라 말하게 되었다!!!) H.O.T, S.E.S, 젝스키스, 핑클도 등장했다.

사랑 노래라는 진부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신승훈과 김건모가 한 세대를 대변하고 있었다. 전람회와 패닉, 카니발, 이승환은 드러내 놓고 20대를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서태지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거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도 큰 히트를 쳤다. 90년대 음악에는 메시지의 다양성이 용인되던 하나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주류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음악에는 사랑 말고도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감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양성과 장르 혼재를 용인하던 대중음악은 왜 힘을 잃었나.

가사나 메시지뿐만 아니라 당시에 등장했던 아티스트들의 장르적 면모도 다양했다. 넥스트는 거의 유일하게 비주류 장르던 하드록,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을 주류 시장에서 내밀었고, 마찬가지로 대학가요제 출신이던 전람회는 재즈를 기반한 팝을 들려줬다. 윤상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에서 아예 밴드 크래쉬(Crash)와 함께 무대에 올라갔다. 패닉의 곡들은 아직도 수많은 밴드키드들의 필수 카피곡이다. 장르는 혼재와 결합을 반복했고, 때때로 이 실험은 대중으로부터 높은 지지도를 이끌어냈다.

본격적인 IMF 시대 이전까지 가요는 이런 흐름을 기반으로 거대한 문화 권력을 형성했다. (지금과는 달리) 음악은 영화에 못지 않은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음반은 10만장을 쉽게 돌파했고, 여기엔 발라드와 아이돌과 록과 팝이 균형점을 이루거나 혹은 서로 교체해가며 시장에서 소위 '팔렸'다. 80년대 후반부터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기 시작한 세대들은 문화를 소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경제는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지만, 문화는 그 거품 덕분에 오히려 다양한 음악적 기반이 용인될 수 있었다. '판'을 내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고, 주된 소비자는 20대였다. 사랑을 하든 청춘에 혼란스럽든 간에 다양한 목소리는 다양한 반응을 얻었다. 그 절정이 1997년이었다. 90년대 후반 소위 20대가 맞이하던 하나의 세계가 ‘졸업’하게 된 것이었다.

주류적 소비 세대던 20대는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10대에 그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20대라 부르는 현 세대가 그 첫 수혜자였던 셈이다. 이 때 이 즈음에 대형 기획사의 팜(Farm) 시스템에 의해 탄생한 아이돌 그룹이 등장했다. 1세대 아이돌이던 이 친구들의 춤과 음악과 무대는 서태지 이후 가장 큰 팬덤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 때, 주류에서 20대는 사라졌다.

2000년대를 보내며 20대는 힘을 잃었다. 청년실업과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듯, 이들이 소비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mp3를 다운로드하고,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도토리로 곡을 구입하는 상황에서 20대의 문화적 소비는 양적으로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창작자에게 음악으로 밥을 벌어 먹는 다는 것은 부가수입을 올리지 못할 경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기획사들은 CF를 찍든, 드라마를 찍든 소위 '먹히는' 엔터테이너를 길러내야 했다. 비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성공한 캐릭터가 되었다. 그의 무대는 누구나 공감할 만큼 멋지지만 많은 사람들은 비 자체를 소비할 뿐 그의 음악이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리진 못한다.

대통령은 까지만 윗 ‘꼰대’들은 까지 못하는 20대

대중음악을 접하고 소비하는 20대는 그래서 더욱 공허할 수 밖에 없다. 현실에서 20대는 찌질하다. 낮은 임금을 감수하고라도 취업을 해야 하고, 윗 세대 꼰대들에겐 저항할 수도 없다. 대통령은 까지만 윗 세대들을 까진 못한다. 몸을 낮추어 자신을 판매하는 다양한 스킬에 익숙해야 하며, 스펙을 쌓아 몸 값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TV 속에서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집착적이거나 상투적이다. 가사는 식상하리만큼 비슷한 내용과 어구가 전부다. 집착과는 거리가 먼 애착(Affection)도 없는 마당에 그렇다고 진솔한 섹스도 없다.

비주류 음악인 장기하가 인기를 얻고,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가 작년 최고의 명반이라는 극찬을 받은 건 우연이 아니다. 연주 실력이 부족한 브로콜리 너마저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건 20대를 반추하는 음악이 주류에 없기 때문이다. 20대는 루저(Loser)인 동시에 민감한 세대이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많은 세대다. 충돌과 좌절, 그리고 무모한 일상적 기대감과 소외감이 혼재되어 있는 시기이다. 2009년의 20대는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감성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그저 신나게 흔들 수 만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주눅들고 싶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회의 문화에 통용되는 한 주류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소녀시대나 동방신기같은 아이돌이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라고 해서 한국 대중음악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회 속에서 용인되는 문화의 범주와 다양성은 그 사회의 생명력을 나타낸다. 한국 대중음악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와 같다. 스타가 팔리고 음악이 팔리지 않는 시장에서 20대는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을 잃는다. 거리를 걸으며, TV를 접하며 가장 먼저 들려오는 노래에 20대의 일상은 소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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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하마곰 2009/07/26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잡지'가 궁금해서 들렀는데 바로 이런 글이.
    자세히 이야기 듣고 싶네요 ㅎ

    • BlogIcon 이니 Astoria 2009/08/03 0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번 주에 날짜를 한 번 잡아보아요. 아 용주도 같이 보면 좋을텐데, 용주가 요새 너무 바빠요 T^T. 일단 문자하겠음.

  2. 코리 2009/07/30 1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왠지 to be continue일것같은 느낌이구나_ 나 여기 비번이 생각이 안나 -ㅅ- 방법없을까?; 펜타스케줄 알려주신분께 대신감사를 부탁(저질체력이라 인천공항에서 gg하고 플라시보 좌석을 끊었슴니돠) 권민이는 월요일 출국-

    • BlogIcon 이니 Astoria 2009/08/03 0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플라시보 부럽다. ETP는 Limp Bizkit은 별로고, Keane은 2월에 이미 봐서 별로 땡기지 않네. 가격도 너무 비싸. T^T 글은 To be continue같다는 평을 수용해 후반부를 좀 더 고치도록 하겠슴다.

    • 코리 2009/08/07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ETP가격을 친구에게 말해줬더니 친구가 그러더라 '롹페는 가난한 롹커나 롹마들이 가는 곳이 아니구나;'

  3. 소로로 2009/10/21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좋은글 담아감니다^^